MSG. To Lime/U'r Ment. 방명록자유롭게 썰해보아요.
비공개 댓글 센스 있으시죠?
Thanks to : (Illusted by UFO 일등항해사)
- 2010/12/31 23:59
- limeserum.egloos.com/2663563
- 36 comments
- 2010/01/05 20:26
- § Daily LiFE
- limeserum.egloos.com/3524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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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적인 폭설이 쏟아진게 어제다. 무진장 한가하다. 한가하면 안되는데.. 하려고 해도 할 일이 없다.
다들 지쳤고 무료해서 꾸벅 졸아도 냅두고 있다. 나도 졸기 일보직전이라.
오늘은 빨리 쫑내고 가야겠다. 이것도 못할 짓거리다.
- 2010/01/05 20:14
- § BOOKchesT
- limeserum.egloos.com/3524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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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 정재승 + 진중권정재승,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나의 점수 : ★★★
정재승, 진중권. 과학자와 인문주의자가 같은 주제를 놓고 썰을 풀어냈다.
주제는 스타벅스, 헬로키티, 몰래카메라, 셀카, 안젤리나 졸리, 구글, 마이너리티 리포트, 20세기 소년, 프라다, 개그콘서트, 강호동/유재석, 9시 뉴스, 레고, 파울 클레, 제프리 쇼 등등 현대 문화를 대변하는 요소들이다.
쉽게 읽혀지라고 쓰여진만큼 과학자나 미학자의 전문적 식견은 자제 되었다. 그들이 지닌 자체적 지식의 아우라는 요소 요소에 등장하지만,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맘에 드는건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지식 자랑하며 여기저기 확장시키지는 않는다. 될 수 있으면 주어진 소재 안에서 이야기를 한다.
같은 소재를 준다. 그리고 읽다보니 소주제도 같은 듯 하다. 사람이니 취향과 관점이 다르고, 대척점에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보니 굉장히 대조적일거라 생각했는데 눈에 띄게 그렇진 않다. 이는 정재승이 과학적 분석이나 시선을 절제하거나, 진중권이 미학적 관점을 자제해서가 아닌 듯 하다. 이들은 헬로키티 하나 만으로도 책 한권을 쓸지도 모르는 썰꾼들 아니던가. 논지가 서로 어긋나는 경우도 있지만, 교차점을 갖는 주제도 꽤 많다. 진중권씨의 책은 몇 권 읽어서 그의 생각에 기울지 않을까, 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해당 소재들의 정보 소개는 사실 왠만한 독자라면 아는 내용이다. 그만큼 잘 알려졌고 또 일상 생활에 밀접하기도 하다. 그것을 놓고 어떻게 생각의 확장을 가져가느냐에 대한 비교가 나름 재미있다. 대부분 알고 있는 소재이기 때문에, 나와의 관점을 낑겨 보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 2010/01/05 19:24
- § FreeEssaY
- limeserum.egloos.com/3523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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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당사자 개인의 시선보다 제3자의 시선이 더 신경쓰이는 상황이 살다보니 적지 않다. 저 남자가 '망설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를 대입시킨다면 부담의 대상은 당사자인 그녀보다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혼자 밥먹기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식당에 아무도 없으면 편하다. 식당 주인과는 손님이라는 명백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단 둘이 오붓하게 해도 되는 프로포즈를 공개적으로 군집 속에서 하는 심리엔 과시욕과 책임감 강화에 기저에 깔려 있다고 한다. 헌데 당사자들은 해당 상황에만 포커스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난 극장에서 프로포즈를 받았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어떤 애정의 언어를 속삭였는지 기억에 없다. 나의 행복한 웃음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함으로써 70%가 형성되었다.
한번은 지하철에서 내 옆자리만 비어 있었다. 그 때 한 청년이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자리를 탐색하던 중 누가봐도 어색한 표정을 지은채 내 옆에 앉았다. 당시 난 노출이 있는 의상이여서 더 그랬을테고, 유독 청년이 소심해서 그런지 모른다. 허나 그의 신경을 자극하는 요소는 내가 아니라 맞은편에서 수다를 떠는 여고생들과 그 외 기타 등등의 제3의 인물들이었다. 나까지 어색한 불편함이 싫어 난 그에게 가벼운 말을 걸었고, 약간의 대화가 오가자 그는 훨씬 편해보였다. 내가 호감을 보임으로써 그 청년은 주변의 (실제로 없을 가능성이 큰) 시선을 묵살 할 수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역시 별다를바 없다. 하다 못해 자기 고백적이거나 나르시즘에 젖은 블로그처럼 익명이 익명들에게, 라지만 실제로 익명들 중에서도 당사자는 존재한다. 내 포스팅의 공감자들이 보편적인 당사자들이다.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자 할 때는 때로 비판의 대상들이 당사자가 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사람은 본능적으로 내 비판에 대한 공감자를 당사자로 무의식 속에 선정한다. 게시물의 작성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광장에서 연설을 하는 것과 같다. 때론 이 행위가 현실에서 미비한 존재감을 극복하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누군가를 찾는 소망이다. 나와 공감하는 사람, 토론해줄 사람, 내가 가진 생각이 옳다고 추가 증명해줄 사람, 격한 논쟁을 해줄 사람 등등.
물론 다른 이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 욕구가 해소 되기도 한다. 허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오늘 토론토가 승리를 하여 기쁨을 같이 나누고 싶은데, 관련글이 없으면 주된 욕구 해소는 되지 않는다. 이 한경우에만도 많은 스타일이 고개를 든다. 내가 쓰고 말지라며 꿋꿋하게 스타트를 끊는 사람, "토론토 이야기는 없네요."라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 난 못하니 누군가가 해주길 바라는 요구를 하는 사람, 누군가 쓸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 결과적으로 하나의 공감, 토론토의 승리 기쁨을 공유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토론토 승리의 기쁨 단계가 지나면 승리의 원인 등 세부적 내용에서 다시금 다양해진다. 단지 몇만이라는 사람이 모였다고 해서 막연하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라 하기엔 부족하다. 단순 공통점의 공유만으로는 절대적 분류만 될 뿐이다. 상황에 따라 대상에 따라,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가변성이 존재하는한, 단순하게 다양한 생각의 집합체라고만 설명 할 수가 없다. 다소 한정 되어 있는 사람들과 부대껴야하는 현실에 비하면, 훨씬 더 복잡하다. 그만큼 시선을 의식해야하는 제3자는 단순 숫자가 아니다. 포스팅하는 순간부터 게시자는 가늠할 수 없는 사고/취향의 다양성과 맞닥뜨려야 한다.
매니아는 밸런스가 잘 맞는 커뮤니티이다. 이는 운영진의 노력에도 그 공이 있지만 무엇보다 유저들의 그것이 감히 압도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준법정신과 이해심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수많은 대형 커뮤니티들이 초기의 모습을 잃고 단발적 싸지름의 트위터형으로 전락했다. 매니아에선 그것을 제재하는 실질적 제도가 없다. 몇자 이상 입력하시오, 빈약한 내용은 삭제 대상, 이런 규제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내용의 게시물은 매우 드물다. 너무 드물어서 몇개만 올라와도 "매니아가 변했다, 변해야한다"라는 호들갑이 주요 이슈로까지 떠오르기도 한다. 이것은 비단 최근만의 현상이 아니다. 7년 동안 매니아에서 활동하다보니 일종의 정기 행사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밸런스가 유지되는 것일까.
유저의 압박력이다. 다른 커뮤니티에서 짬밥이 찼다면 모를까, 기존 유저들로부터 만들어진 아우라는 굉장히 강하다. 다른 커뮤니티처럼 낚시의 반복, 뻘소리의 향연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신규 유저나 눈팅 유저 중에선 쓰고 싶어도 안쓰는게 아니라 못써서도 아니라, '올리기가 겁나서'라는 이유로 수많은 글들이 자신의 안에서 묻어져버렸을 것이다. 단순히 유저들의 기가 세서가 아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온 암묵적 담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압박의 원동력은 상급레벨 유저들의 '수준'이다. 아무리 모토가 "NBA를 사랑하는 누구나"일지 모르나, 어떤 뭉태기이든 조직적인 체계가 필요한 수가 되면 헤게모니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권력을 내비추거나 능동적으로 사용한다는 말이 아니다. 아니 권력이라 생각하는 사람조차 없을 것이다. 이는 그들을 바라보는 수많은 제3자들로부터 만들어져왔다. 어느 한 개인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매니아의 역사를 지탱하고 있는 '훌륭한 게시물'들이 그 원동력이다. NBA 초보나 매니아 신규 유저중 적지 않은 수가 그들의 잘 쓰여진 글에서 표본을 본다. 나처럼 아무리 오래 NBA를 봤어도 보는 눈이라곤 제로인 나일론 같은 경우엔, 거의 90% 고정화된 몇몇의 시선에 절대적 의지를 한다. '매의단'의 누구, '기사단'의 누구, '뉴저지'의 누구, '포틀'의 누구, '올랜도'의 누구, '멤피스'의 누구 등, 바로 떠오르는 아이디들이 있다. 이들의 권위가 단순히 우수한 정보력과 분석력으로 주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내가 그들을 존중하고 또 자극을 받는 이유는 문장의 수려함, 통찰력 따위가 아니다.
그들의 글엔 노력과 진정성, 그리고 정성의 향기가 매우 농도 짙게 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쯤 되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대충 갈겨대기란 부담일지 모른다. 물론 보다 많은 공감대를 얻고, 보다 많은 경외에 대한 욕구일수도 있다. 설령 그러할지라도 그것만 갖고 많은 이들이 추천 버튼을 아낌없이 누르는 글이 나오기 힘들다. 오래 전 잠시 동안 시시한 월간잡지 기자였지만 떠올리건대, 자신의 글에 애착과 확신이 없다면 정성조차 들어가지 않는다. "내 글에 배고파하는 너희에게 만나빵을 하사하겠노라."가 아니라, 글을 쓰는 주제의 대상을 향한 진정성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취향/사고들을 만족 시킬 수가 있다. 아무리 내용 자체에 반감이 들더라도, 정말 비도덕적이 아닌 이상 정성을 다해 게시물을 올렸다면 비판의 자세는 단순 감정적에서 한층 이성적 정성을 들이게 되어 있다. 그것은 커뮤니티 상의 글쓴이에 대한 예의이다. 그 예의를 지키지 않는 답글유저들을 우린 악플러라고 한다. 매니아에 악플러가 없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이 곳에도 기본 예의를 제껴버린 악플러들은 분명히 있다.
매니아에서 가장 지탄이 되는 게시물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개인홈피에서도 다이어리란에 찔끔거릴 정도의 내용을 두서없이 던져놓고 올린 글이다. 둘째는 자신이 응원하는 팀과 선수만을 중심으로 쓴 글이다. 그리고 셋째는 이 둘이 복합되었을 때, 가히 폭풍이 불어닥친다. 개인적으로 둘째의 경우는 매니아의 기본 모토중 하나인 '배려'에서 벗어나긴 해도, 해당 글에 충분한 노력과 진정성이 있다면 나름 흥미롭게 읽는다. 그 내용이 아니라, 그렇게 쓰여진 글에는 반박 댓글의 내용이 알차기 때문이다. 그 댓글들을 통해 얻는 바가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첫째든 둘째든 셋째든 매니아에서 금지된 것은 없다. 개인의 호불호만으로 다른 사람의 표현 자유까지 제재할 권리는 5공 시절 허문도나 박수칠 사항이다. 금지된 것은 없지만 금지된 것보다 더 한 일을 겪게 될 뿐이다. 흔히 몇몇 반박 댓글이 달리면 운영진의 삭제가 아니라, 스스로 삭제한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본다. 운영진은 아무 글이나 삭제하지 않는다. 단지 몇몇이 반박의 댓글을 달았을 뿐인데도, 본인이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글에게 사망 선고를 내린다. 애시당초 "난 뭔가 정말 생각이 다르다."의 불붙은 의지라면 지우지 않을지 모른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너무 다른 반응이 쏟아지자 당황스럽고 민망한 것이다. 게시판의 평화를 위해 진심어린 반성의 행동일 수도 있지만, 대개 이후에 뒤끝이 존재하는 걸로 봐서는 그리 흔치 않다. 사과는 사과로서가 아닌 또다른 자기 주장이고, 변명인 경우를 적지 않게 보지 않는가.
그런데 말이다. 과연 거의 고정화되다시피한 몇몇 유저의 영향력으로 매니아만의 유저 자정력이 생겼을까. 당연히 아니다. NBA만 놓고 봐도 댓글들을 보면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일까" 정도의 궁금함을 자아내는 유저들이 넘쳐난다. 포스팅을 안할 뿐이지 그들이 가진 지식들은 전문가 자체이다. 스포츠 게시판을 가면 난 도대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를 체계적으로 구사하는 사람들도 넘쳐난다. 자유게시판을 가면 요즘이야 가십/연애가 대부분이지만, 갖가지 분야의 진지한 내용들은 굉장히 알차고 유용했다. 이 곳에서 배운 것들이 지식으로 쌓이고, 일상에서 긍정적 자극이 되는 경우도 결코 적지 않았다. 이러한 부분들이 단순하게 가진 지식과 살아온 날들이 많아 쌓인 연륜들로만 채워질 수는 없다. 태도이다. 다른 커뮤니티에서는 방사하는 기분으로 깨작거리면 그만이지만, 매니아에서는 방사조차도 때론 정성스럽다. 양파군 선택하는거 생각보다 귀찮다. 자주 쓰지 않으면 원하는 그림 찾는 것도 일이다. 나도 때론 다소 가벼운 커뮤니티에서 키치의 미학을 마음껏 누린다. 인터넷 생활에서 그것은 때로 유용한 배설 통로가 된다. 허나 매니아를 오면 한 손으로 발가락 사이를 후비고 있는 불량한 자세일지언정, 텍스트 전달의 진지함은 지킨다. 이는 제3자에 대한 시선 의식이 기저에 깔려 있겠지만, 동시에 매니아에 대한 애정을 품은 소침한 유저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매니아 회원중 누군가의 표현따라 인터뷰는 내게도 가문의 영광이고 (내가 어디서 감히 인터뷰까지 하겠나) 나름 오랜 시간 채팅이나 쪽지로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몇몇 이들은 비록 넷상이지만, 훌륭한 소통로이다. 항상 개인적 사정으로 들락날락 했던 이 곳이지만, 다시 찾아도 약간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기본적인 모습은 변합없다. 운영진도 공지로 못박지 않았나. "매니아는 10년 동안 한결같습니다!"라고. 이십대 중반부터 시작했던 것이 벌써 서른셋이다. 그 동안 별놈의 일 다 겪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매니아는 큰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매니아가? 아니다. 매니아의 유저들이 그 안식처였다. 여기 아무도 없고, 나 혼자 회원이라면 아무리 매니아를 사랑해도 의미가 없다. 운영진들만 달랑 있는 커뮤니티에 무슨 의미가 있나. 모두가 등돌려도 나만은.. 이따위 입발린 소리는 입에 담지 않는게 상책이다. 다수의 힘으로 유지되는 곳이 모두가 등돌렸다면 문제가 있는거다. 허나 이 곳이 그렇게 될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른 곳처럼 한순간에 일기장 게시판으로 전락할거란 우려도 들지 않는다. 간간히 그런 우려가 한껏 부풀려 몇몇 유저들에 의해 이슈화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개인 호불호로 전체를 아우르고 싶은 욕구일 뿐이다. 훌륭한 유저들이 탈퇴를 하고, 저마다의 삶에 치여 발걸음이 뜸해져도 또 새로운 그만큼의 스마트한 이들이 채워진다. 새로운 이들이 이 곳을 그들만의 세상으로 통째로 뒤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쌓여진 수많은 매니아 유저들의 진정성의 힘은,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김경욱이 그랬던가. "독자로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계몽이 아닌 공감이니."라고. 설령 내가 더 많이 안다고 해서 누가 누가를 가르치려하면, 그 내용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유대감의 의미는 퇴색된다. 이 곳을 지탱하는 진정성의 바탕엔 그만큼 많은 유저들이 인정한 공감대가 있고, 수없는 가변성으로 다양화 되었다고는 하나 뭉쳐지는 하나는 있는 법이다.
'광산의 카나리아'란 말이 있다. 광부들이 갱도에 들어갈 때 유독 가스에 민감한 카나리아를 데리고 갔다고 한다. 매니아의 모든 유저들은 카나리아이다. 기본 질서와 배려의 정서에 반하는 유독 가스에 매우 민감하고, 지키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카나리아.
- 2010/01/04 20:50
- § BOOKchesT
- limeserum.egloos.com/3522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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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독서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나의 점수 : ★★★★★
책을 집어들며 가로가 아닌 세로로 싸여 있던 카피태그가 좋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소설적 재능의 폭주..라는 문구가 아니라 약간의 편리함에서였다. 이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 카피태그의 걸리적거림이 없어서 입증해주었다.
단편집 '위험한 독서'는 총 8편으로 구성되어있고, 첫 작품은 책의 제목인 '위험한 독서'였다.
첫편을 다 읽고 난 후 놀랬다. 굉장히 오래 읽은 듯 했는데, 분량이 겸손했기 때문이다. 지루하거나 모호한 문장에 의한 반복적 읽기 때문이 아니었다. 읽는 내내 간간히 책을 덮고 생각에 잠시 잠겼던 시간들이 누적된 결과였다. 이해하지 못해 곱씹어서가 아니라 문장들을 내 안으로 소화하고 싶었다.
<위험한 독서>의 주인공은 '독서치료사'이다. 풍부한 독서량만큼이나 사고의 폭은 넓고 매사에 냉철하다. 한 여성 고객과의 상담 과정이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도입부는 그녀를 회상함으로써 시작된다. 상담 과정에서 작가는 적지 않은 책들의 문구들을 인용한다. 책의 페이지를 적어놓지 않은 것에 대하여 작가는 "궁금하면 니가 찾아봐라."라는 식의 메시지를 각주를 통해 전달한다. 영화나 드라마에 쓰인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쉽지 않겠느냐는 말에, 뜨끔해졌다. 책의 인용구들은 그 자체가 지닌 의미에 고개가 주억거리기도 하지만, 시의 적절함에 아! 하게 된다. 읽은 책의 구절이 모티브가 된건지, 그의 관념이 모티브가 되어 오버랩된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는 커피와 차 중에 무엇을 마시겠느냐의 결정조차 한참이 걸릴정도로 소침하다. 4자매중 막내딸로 원치않는 자식인지라 부모에게 받은 핍박은 트라우마가 되어 현재까지 이르렀다. 그녀의 상담 주제는 겨우 '남친과의 이별 극복하기'였고, 그녀가 읽은 책이라야 "다이어트 정복!"따위였으며 권한 책은 내용보다 작가의 삶을 먼저 들여다보았다. 주인공은 그녀를 조소하면서도 시간이 지날 수록 그녀의 세계에 흥미를 느낀다. 흥미는 감정이 되고, 감정은 사랑인지 뭔지 모를 관념으로 자라나버렸다. 상담 과정이 끄트머리로 갈수록 그에겐 조바심이 생기고, 결국 7년간 연애 과정에서도 지켜냈던 그녀의 처녀성을 깨는 하루를 보내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감 있는 삶을 살아가면서부터 그는 상실감에 허덕인다.
스토리 과정에서 주인공이 갖는 심리 묘사는 종국에 애틋하기까지 하다. 기존 소설들의 인용구는 부연 묘사를 위한 단순 장치를 넘어서, 또 하나의 표현으로 흡수되어 있다. 이는 문장의 수려함이 아닌, 공감의 척도로서 그것들이 적절하게 간섭하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사수 대작전>은 IMF로 망한 집의 딸이 생계를 위해 맥도날드에서 취업한다. 모종의 단체로부터 맥도날드를 향한 테러협박 전단지가 뿌려짐으로써 벌어지는 소소한 에피소드를 어린 감수성으로 잘도 표현해냈다.
<천년여왕>은 개인적으로 참 좋았던 작품이다. 작가 지망생인 화자가 서울에서의 삶을 접고 첩첩산중으로 거처를 옮긴다. 5살 연상이지만 자신에게 늘 존칭을 쓰고, 싹싹하며 심성이 고운 여자라고만 생각했던 아내가 고립된 시골 환경에서 변화를 겪는다. 아니, 변화가 아니라 본래의 모습을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몇 가구 되도 않는 마을로 오면서부터 아내는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고, 활발한 교류를 하더니만 어느 새 '현명,용기,사랑'으로 무장한 마을의 히로인이 되어 있었다. 아내는 세상 모든 책을 읽은 듯 지식이 방대하였고, 어떤 언어이든 쉽게 섭렵했으며, 때론 자신의 마음까지 읽어내는 것 같았다. 그런 아내가 기본적인 동화의 내용은 알지 못했다는 의심에서 시작하여, 어느 새 화자는 아내를 외계에서 온 생명체로까지 생각의 확장을 한다.
내용 자체는 황당무계하지만 실로 외계나 천년여왕의 환타지적 요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가끔 욕구가 솟아 치근덕거리는 자신에게 "하고 싶어요?"라고 물으며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아내는 꽤나 매력적이다. 화자의 시선으로 묘사되는 아내는 넘치는 섹시함도, 눈부신 지성을 갖춘 여자가 아니다. 마치 모든 것을 아는 엄마가 소년을 보듯이 지그시 화자를 애정으로 감싸는 느낌을 작가는 화자의 시선만으로도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그외 단편들,
게임의 규칙
공중관람차 타는 여자
고독을 빌려드립니다
달팽이를 삼킨 사나이
황홀한 사춘기
- 2010/01/01 13:23
- § BOOKchesT
- limeserum.egloos.com/3516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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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나의 점수 : ★★★
약간은 지겨울 정도가 되지 않았나 싶다가도 읽어나가다보면 또 금세 맛깔나는 문장과 끄덕여지는 이야기들에 결국은 다 먹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그것이 박완서 할머니의 소설이 아닌가 싶다.
중산층의 중년 주부가 돌아보는 치열했던 삶의 과거와 감성. 이 공통 분모를 유지한채 단편들이 옹기종기 모여 저마다가 겪은 경험을 토대로 다져진 감수성을 토해낸다. [거저나 마찬가지]에는 단편집이 가진 공통 분모에서 살짝 빗겨나가기도 하지만, 전반적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단편 구성은 다음과 같다.
1_그리움을 위하여
2_그 남자네 집
3_마흔아홉 살
4_후남아, 밥 먹어라
5_거저나 마찬가지
6_촛불 밝힌 식탁
7_대범한 밥상
8_친절한 복희씨
9_그래도 해피 엔드
마치 한 사람이 9번의 삶을 각기 다른 형태로 겪으면서 느낌 감수성을 이야기하는 듯 하다. 모든 단편의 주인공들은 크고 작은 결핍과 마음의 짐이 있다. 그리고 상실을 통해 자기 결핍에 정면으로든 측면으로든 맞서게 되고, 대부분 극복해낸다. 여기서의 극복이란 현실적으로 커다란 전환점이 주어진다거나 소위 팔자가 바뀌는게 아니다. 또 그러기엔 너무 늦은 (순수하게 나이 측면에서) 주인공들이 대부분이다. 때론 당사자로부터, 때론 자기 성찰로부터, 때론 주변 인물들로부터 주어진 작은 모티브가 어떻게 중노년의 여자가 극복해나가는지를 섬세하게 정말이지 징글맞도록 잘 표현해낸다.
할머니들의 감수성은 소녀이다. 가끔은 소녀같은 언어도 내 것인양 사용한다. 그런 면이 난 늘 좋다.
- 2009/12/30 22:35
- § FreeEssaY
- limeserum.egloos.com/3513501
- 2 comments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모든걸 지킬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하는 착각은 올해에도 변치 않았나 싶어요.
나름대로 당면한 문제들에 도망가지 않았거든요.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정면 충돌을 하려 노력했지만, 돌아보면 올 한 해도 참 많이 비겁했어요.
때론 너무 정면으로 들이대서 튕겨나가기도 했지요.
나중에 생각하니 그런 객기도 결국 솔직하지 못한 자신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었나 싶더라구요.
이러나저러나, 기존의 내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기시감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가 없었어요.
선택해야하는 순간, 그 현실이 두려워 멀찌감치 관망하는 비겁함을 침착함 혹은 현명함이라며,
남들과 나부터 쏘아지는 힐난의 광선으로부터 방어하려고 했을거예요.
본능이래요, 이런 면은. 무언가를 선택함으로써 무언가가 희생될 것 같을 때 응당 고개를 드는 본능.
그 때 맞부딪힘으로써 치루어야할 희생보다 도망감으로써 치루어야할 희생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이젠 겪을만큼 겪어서 알면서도 갖가지 핑계로 모르는척 하곤 해요.
당장 편하고 싶어서, 눈가리고 아웅하고 싶어서, 지금 내가 모르는 척하면 누군가 해결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나중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어서, 지금만 넘기면 다음엔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저 지금 이 순간만 어떻게든 넘어서고 싶어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모든걸 지킬 수 있는 길이 아닐까,
뭔가를 선택하면 가진 모든걸 무너뜨리는 독배가 아닐까.
이 나약하고 비겁한 자기보호과정에서 당연히 힘겨울 수 밖에 없는 누군가들,
그들이 나로 인해 고통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난 더 힘들어... 라면서
볼품없고 초라한 핑계로 자기 보호를 해요.
내가 힘든건 도피를 정당화하고자 스스로 판 동굴에 갇힌 이기심 뿐이고,
누군가들이 힘든건 정말 나 때문인데.. 그걸 알아서 무기력한 내 자신에게 화가 나서,
되려 윽박지르고 그나마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들을 무너뜨려요.
무너지면 더 가관인걸요.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발악하거나,
모든게 나 때문이야.. 이젠 끝이야.. 라며 전혀 도움도 안되는 자학에 빠져요.
그러면서도 바라죠. 날 다독여주겠지, 날 가여이 바라보겠지.
행여 그런 낌새가 보이면 더 망가지고 더 힘든척 해요. 어릴때도 안한 짓거리를 서른 넘어서 해요.
누군가 날 다독여주고 감싸주면, 마치 정말 난 가엾기만 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되어
나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짜 이유가 되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기 싫어요.
늘 찌질하다고 병신같다고 욕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게 내 모습이란걸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 자수를 못하면, 영원히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거예요.
무섭잖아요.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진짜 모습이 찌질한 병신이라면 얼마나 무서워요.
결과가 이러하니까, 내가 혼신의 힘을 다했던 모든 노력과 시간의 과정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또다시 이 멍청한 짓거리를 반복할지도 모르죠.
세상은 늘 세상 탓 하길 좋아해요.
그런데 정작 문제는 늘 자기 자신에게 있는거잖아요. 누구 탓할거 없더라구요.
옳지 못한 선택을 해서 무너졌던 날보다,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아서 무너졌던 날들이 더 가슴 아파요.
내일이면 올 한 해도 마지막이네요.
가장 바쁘고 피크 중 하나인 어제 오늘을 쉬면서 수입은 손해를 봤지만,
이틀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쏟아낼만큼 쏟아냈던 것 같아서 개운하기 그지 없어요.
마지막 날인 내일은 하루 종일 "용감해지자"를 달달 다짐하려구요.
그래서 내년부터는 씩씩하기만 한 내가 아닌, 정말 용감하고 씩씩한 내가 되고 싶거든요.
누군가 자학과 자조는 혼자 하다가 망각의 주머니에 쳐박아버리고,
자기 반성과 다짐은 어디엔가 표출한 후 책임감을 가지라 하더라구요.
언론용 즉 주변인들에게 포장된 자기 반성이 아닌,
정말 솔직해서 너무 부끄럽고 혐오스러워서 차마 나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지금 이렇게 평안 할 수가 없네요. 거기 당신들은 뭐가 그리 힘들었나요..
- 2009/12/30 20:38
- § BOOKch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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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나의 점수 : ★★★★
표지에 딸린 광고 카피는 '미스테리 소설'이란 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달콤한 나의 도시]를 떠올리면, 왠지 정이현과 절대 어울리지 않을 흐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오늘의 거짓말]과 [낭만적 사랑과 사회] 같은 단편집을 생각하면 낯선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맥락으로 본다면 [달콤한 나의 도시]가 쌩뚱맞게 느껴지려나. 빈도수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소설에선 서울 부의 상징 강남과 중산층이 주요 등장 배경/인물로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소외감 혹은 소통부재로 비뚤어져 있거나, 가정의 평화나 개인의 안정성을 위해 저지르는 비양심적 행동들을 합리화시킨다. 무관심에 내던진 부잣집 딸이 유괴극을 자작하여 부모에게 돈을 뜯어낸다거나, 아들이 원조 교제중 교통 사고를 일으켜 중학생 소녀가 죽음에 이르자 이기적이고도 다소 파렴치하게 대응하는 남편을 혐오하면서도 유지되는 평안함을 느낀다거나..
그런면에서 [너는 모른다]는 '미스테리'라는 카테고리가 무색하게 느껴진다. 치밀한 수사나 복잡한 미스테리, 기막힌 반전 등은 애시당초 기대 할 수 없다. 그런 류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존 단편집의 확장된 연장선상의 느낌이려나. 주요인물과 배경은 역시나 서울이란 도시의 안에 거주하는 중산층이며 소통 부재에 시달리는 가족 구성원들이다. 전형적 무관심형이며 감정적 남편 김상호, 막내딸의 바이올린 교육이 가장 큰 기쁨인 아내 진옥영, 매사에 반항적이고 아예 뛰쳐나가 혼자 살며 정서적으로 불안한 전처의 큰딸 김은성, 반항도 순종도 아닌 채로 있는 듯 없는 듯 벽을 쌓고 사는 전처의 아들 김혜성, 어디에서도 존재감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김상호-진옥영의 막내딸 김유지. 그리고 김유지가 실종되면서부터 이 가족들은 각각의 다른 감정과 이유로 서서히 패닉 상태가 되어간다. 아이가 실종되던 일요일, 가족들은 저마다의 압박감에 시달린다. 장기매매가 사업인 김상호는 경찰을 불렀다가 스스로 입을 타격에 전전긍긍하며, 엄마인 진옥영은 그 날 친정에 간다해놓고 옛 애인을 만나기 위해 대만으로 출국했다. 김은성은 동생인 유지에게 늘 무관심했고 그 날도 어김없이 남자에게 차여 히스테리한 상태였을 뿐이며, 혜성은 또다시 여친과의 섹스 실패와 방화 본능으로 밤거리를 방황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그 날의 유지 돌봄을 하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이 사건은 이 소설의 중심이 아니다. 사건이란 가족과의 소통 부재, 아이 혹은 동생의 실종 앞에서 무너뜨릴 수 없는 그들만의 현상 유지와 비밀, 고뇌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가족간/자기자신간의 소통/화해를 꺼내기 위한 도구일 따름이다. 캐릭터 하나하나는 전형적이지 않지만, 그들이 지닌 본질적 두려움과 고뇌는 우리의 그것들과 다르지 않다.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듯 해도 실상은 원초적이며 단순한 자기 합리화와 방어 기제일 뿐이다. 그렇기에 유지의 실종 초기엔 스스로들이 상정한 갖가지 문제들과 연관지어 복잡하게만 느껴졌던 벽이, 실종의 나날이 길어지고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유지의 부재가 가슴에 파고들면서부터 이들의 문제는 단순해진다. 어떻게든 유지를 찾아야한다. 유지의 실종은 결과적으로 희생이다. 가족간의 벽을 허물고 소통을 되찾기 위한 희생. 유지는 유일하게 소통이 되었던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된 언니를 만나기 위해 머나먼 안산까지 홀로 떠났고, 대부도에서 홀로 남겨진채 헤매다가 뺑소니를 당했다.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싶을만큼 순수하고 사랑스럽게 묘사된 이 소녀의 불행이, 김상호를 진옥영을 김혜성을 김은성을.. 그리고 링링은 진옥영 대신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그들의 깊고 깊은 짐과 골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었다.
책을 펼치고 단숨에 다 읽어낼만한 몰입도는 분명히 있었다. 허나 왠지 모르게 허한 느낌이 든다. 그것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와 담담함으로 갈등이 해소되어버린 허함인지, 읽는 내내 뭔가 어정쩡한 듯한 애매함에서 느껴지는 허함인지는 모르겠다. 항상 정이현 이란 작가에게 요구했던 공감의 요소를 내가 놓쳐버렸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더라도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 작가의 책, 그 허함이라도 그래서 좋다고, 뻔뻔하게 말할 수 있을만큼 난 좋다.
- 2009/12/29 16:47
- § FreeEssaY
- limeserum.egloos.com/3511152
- 2 comments
"오빠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왜 항상 그렇게 혼자 멋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해석하는건데. 이젠 그 넘겨짚는 오빠의 행동에도 지쳤어."
정확히 기재한건지는 모르겠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치열하게 싸우는 커플에게서 흘러나온 전쟁의 언어는, 새삼스레 가슴을 쳤다. 세상이 변해도 연애 전선에 휴전이란 없고, 난 솔로여서 평화로운데 세상은 부럽게도 여전히 국지전이다.
면허 1-2년차 오너 드라이버가 가장 위험한 시기라고 했다. 한 몇개월 끌고 다니니 사고도 없고, 대충 끼어들고 과속해도 별 문제 없는게다. 이쯤 되니 "오아 나 운전에 소질 있나봐!"가 된다. 허나 내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사고란, 나만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고 너만의 잘못도 아니다. 숨만 쉬어도 쌍방과실이란 말, 괜히 있는게 아니다. 사랑, 이 이정쩡한 면허 1,2년차의 연속이다.
공공의 적2인가중 박근형이 소환 되면서 검찰청 앞에서 씨부린 역사가 평가 어쩌고, 모든 것이 국가 발전과 국민을 위해..
이따위 변명만큼인 흔한 이혼/결별의 사유가 '성격 차이'이다. 제3자가 보기엔 '또 성격차이? 찌질하긴' 이럴지 몰라도, 막상 당사자가 되면 사실 이만큼 모든 것을 통합하여 아우를만한 사유 단어가 없다. 그리고 이 '성격차이'의 바탕엔 멋대로 생각하는 당신!이 아마 대다수 사유일테다. 근데 이게 초큼 웃긴게 말이다. "니가 나에 대해 뭘 알아?"와 "이만큼 나를 겪고도 몰라?"가 때때로 같은 상황에서 쓰여지기도 한다는거다. 한 지인의 이별 상황을 몰래 훔쳐보자.
여자와 남자의 이 자리, 불편스럽다. 이건뭐 헤어진 것도 아니고 애정중도 아니다. 10년을 만나왔는데 첫경험보다 불편스럽다.
여자 : 10년이다. 지쳐간다. 연애질의 달콤함도 정도껏이지 서른에 다다랐는데, 결혼할지조차 언급도 없다. 두 달전 정리하자고는 했으나, 이 만남에 응한건 아직 남은 미련이다. 몇년을 이 미련을 모티브로 하여 사랑으로 키워왔다. 하지만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래도 이 미련을 다시 동하게 해준다면, 나 사랑할 수 있는데...묵묵히 평소처럼 대해준다. 눈물이 쏟아진다. 아직 날 사랑한다는둥, 기다려달라는둥, 어떤 말도 없다. 지금은 그따위 유치함이 간절한데 말이다. 내가 왜 우는지도 묻지 않는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에서 훌러덩 타고 가버렸다. 아.. 이젠 정말 굿바이 당신.
남자 : 만나달라니 만나준다고 했다. 무슨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더 붙드는건 이 아이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평소처럼 행동했고, 이 아이도 평소처럼 받아준다. 뭐가 달라졌지? 없는 것 같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온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울기 시작한다. 아, 내 착각이었나보다. 정말 끝인가보다. 매달리고 싶은데,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면 이 아이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일테지. 차라리 모른체 하자. 왜 우냐고 묻거나, 눈물을 닦아주면 우리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기, 이제 그만 됐다. 안해도 이젠 우리 끝이다. 버스가 온다. 여전히 운다. 뭐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인데 모르겠다. 쿨하게 가자. 이젠 정말 굿바이 당신.
요약 각색이 있지만, 실제로 양쪽 모두를 만나 들었던 그 날의 실황이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랬고, 남자는 여자를 안다고 생각하여 넘겨짚었다. 그것은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부담과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배려로 포장한 멋대로 생각하기 결과였다. 보편적 성향의 기준으로, 여자는 그게 끝이다. 여자의 이별 과정이란 순차적으로 오래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 조금씩 조금씩 버려나가는 과정이 있고, 그 과정에서 다시 합치기도 한다. 허나 그 과정의 최종착점까지 사랑을 다시 키워나갈 수 없음을 느끼면, 이젠 굿바이. 남자는 그 때부터이다. 남자의 이별 과정은 헤어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 때 왜 자신이 잡지 못했는지, 왜 아무 말도 않고 쿨한척 한 것이 여자를 위한거라 착각했는지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나 이뻐죽겠어? 근데 당신 나 이렇게 이뻐하면 안되는데.. 그러면 안되는데."라는 말로 여자는 암시를 해왔고, 남자는 어렴풋이나마 알면서도 "난 아직 니가 너무 이쁜데."라면서 불안한 현실을 뭉개버려왔다. 기다려준만큼 기다리고 참아줄만큼 참아준 여자의 입장도, 정말 속내를 알 수가 없어서 갑자기 이별하게 된 남자의 입장도, 이쯤 되면 돌이키기가 힘들어지는 서글픔만 남게 된다.
내 삶도 늘 같은 오류 반복의 연속이다. 누군가 나를 정말 잘 안다고 생각하여 늘 멋대로 한다. 정말이지 신경질이 난다. 그게 배려인줄 안다. 심지어는 자신의 속깊음을 칭찬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것 같아, 후려치고 싶어지기도 한다. 독심술이라도 익혔나, 니가 뭘아는데. 그런데 말이다. 뻔히 알면서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서 짜증이 난다. 정말 모르는걸까? 모르면 몰라서 신경질이 난다. 내가 열어준 마음이 얼마인데, 이것도 모르지? 관심이 없는건가 진지하지 않은건가. 안다고 깝대서 짜증나고, 모르면 몰라서 신경질 난다. 늘 그 당시에는 논리정연하면서도 빠져 나갈 구멍조차 없이 철저하게 틀어막지만, 지나고보면 나란 인간 모순 투성이다. 어처구니없는건 이런 사실을 명백하게 알더라도, 늘 망각해버린다는 점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난 늘 진절머리나게 실천하는 셈이다.
'성격차이' 그 사람과 내가 정말 달라서인가. 아니기도 하고 맞기도 하다. 남자와 여자란 원래 다르니까. 하지만 본질적인 차별점을 떠나 실질적인 이유는 '앎'에 있다. 그리고 그 '앎'이란 고상한 정신 체계나 정서적 교감만으로 깨우칠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때론 지저분하고 통속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릴지라도 '대화' 뿐이다. 진지한 자세로 타협점을 찾을 때까지, 아니 적어도 어느 정도 상대를 이해 할 수 있을 때까지 대화를 해도 해답이 안나오면 그 땐 '성격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여 멋대로 생각하거나, 당연히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만이라면 그건 '성격차이'가 아니라, '앎'의 문제이다. 아는 것 같아도 더 알고 싶어하고, 알아주길 바래도 표현하고..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택도 없다. 알려주고 알아먹는 관계에서 사랑은 비로소 싹튼다. 정신적 교감? 훗 우린 신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다. 알려서 떠먹여주고 알아서 잘 먹어줘야하는 인간일 뿐이다. 그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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